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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복속 기점으로 국가정체성 큰 변화”


세계일보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에는 조선 건국과 통치의 이념이 깃들어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최종석 교수 ‘역사비평’서 주장 / 고려 전기, 中 왕조와 마찰 회피 위해 / 대외적 차원에서만 군신의례 수용 / 원 복속 이후 속국 정체성 받아들여 / 조선 건국 후도 문명중화 가치 추구 역사에서 창업의 기틀을 다진 왕과 신하는 구시대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 골몰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이성계는 토지개혁에 착수하고, 권문세족에 의해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를 강화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뒤에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국가의 근본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꿨다.
이처럼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기존 체제와의 단절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연속성을 띠는 대목이 있다.
바로 중국에 대한 조선의 자기정체성이다.
최종석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에서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분석했다.
그는 “(조선 건국 초기의) 변화들은 원 복속기를 분기점으로 전환된 사회구조 내에서 벌어진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고려 전기의 국가 위상은 대외적으로 황제의 신하이면서 대내적으로는 군주의 위상만을 지녔다”며 “고려는 황제국 체제와 제후국 체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향하지 않아 두 체제가 혼합된 양상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원 복속 이전까지는 황제의 신하라는 위상이 국내에 관철되지 않았다”며 “중국 왕조와 물리적인 마찰 없이 공존하기 위해 외교현장에 한해 중국 측이 마련한 군신 의례를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명절 등에 신하가 군주에게 하례를 올리는 ‘조하의례’를 보면, 원 복속 이전에는 고려국왕이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신하들로부터 경하를 받는 예식만을 향유했다.
중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경하를 전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외적인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복속으로 고려는 제후국 혹은 속국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됐다.
최 교수는 “원 복속기 국왕의 위상은 공히 황제의 신하이면서 자신의 영토와 신민을 보유한 군주가 됐다”고 설명했다.
조하의례의 경우에도 국왕이 자신들의 신하로부터 경하를 받는 ‘수조하 예식’과 국왕이 황제의 궁궐을 바라보며 경하를 올리는 ‘요하의례’를 병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국왕이 신하들을 대동하고 의례를 거행한 것이 신하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신하의 신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태도는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하고 명나라가 등장한 이후에도 유지됐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제후국 체제를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 교수는 “태종 대를 기점으로 조선은 자신을 공간과 종족 측면에서 중국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전제하면서도 천자를 정점으로 한 천하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다”면서 “공간적으로 (세계의) 주변에 자리하면서도 문명 중화를 보편가치로 간주해 스스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조선의 자기 정체성은 중국 왕조로부터의 독자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게 향유한 고려 전기와 비교하면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은 셈&r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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